8월 2일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아시나요? 14일만에 900만을 돌파하며 1000만 초읽기에 들어간 흥행 영화 입니다. 택시운전사는 송강호 주연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5 18민주화운동이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제 이 영화를 보고 왔는데요. 5 18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자랑스러운 민주화 운동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슴아픈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아픈 역사가 마음을 울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원인이나 배경,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기성세대들조차 그 배경을 몰라서 "이게 왜 이렇게 된거야?"라고 속닥이는 소리들이 많이 들렸습니다.

 이를 보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에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원인과 배경,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포스팅 하고자 합니다.


1. 518민주화 운동의 배경

 

 1.1 1026사태와 1212군사쿠데타 

  518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독재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꿈꾸었고, 군사정권은 다시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폭풍 속에 있었습니다. 그 격변의 시초를 알린 것이 1979년 10월 26일 일어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사건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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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를 살해하는 최규하의 모습)


  당시 중앙정보부장, 지금으로 따지면 국정원장격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대행을 하게 되고 그 해 12월 6일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는 1961년 박정희가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지 18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국민들은 18년간 이어진 독재 정권은 종말을 기대 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에도 민주주의에 여명이 밝아 왔다라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212쿠데타의 주인공 전두환)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도 얼마가지 않아 최규하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 된지 6일만에 전두환에 의해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대통령 취임식을 9일 앞둔 상황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가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와 내통 했다는 명분으로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로써 전두환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최규하는 예정된 대로 21일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지만 사실상 정상적인 국정운영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대통령 취임 8개월만에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로써 박정희의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끝날것 같았던 군사정권의 독재 정치는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에 의해 그 기간을 연장하게 됩니다.



  1.2 민주화에 대한 열망 '서울의 봄'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이제는 독재의 압제 속에서 벗어 날 수 있을것이라는 큰 희망 속에 있었던 당시의 국민들은 1212사태로 인해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 섰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것은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5월17일까지 정치적 과도기를 일컫는 말로써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서 빗댄 말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기에 민주화의 봄이라고도 부릅니다. 당시 국민들은 민주화에대한 열망으로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부르짖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은 주로 대학생들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5월 13일을 기점으로 거리시위는 큰 규모로 발전 하였고 5월 15일 서울역에서의 시위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시위는 서울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죠. 그런데 이런 시민들의 움직임에 신군부는 적반하장으로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는 만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을 촉발 시킨 것입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2. 518민주화 운동의 전개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5가지 국면으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2.1 제 1시기 - 전남대에서 촉발된 시위 


   제1시기는 학생들의 시위로 인한 항쟁의 발단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은 전남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대학교는 계엄령에 인해 휴교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전국에 공수부대들이 주둔하면서 학교 입구를 막고 등교하는 사람들을 저지했습니다. 이제 맞서 학생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무자비 하게 구타합니다. 그들은 쇳조각이 박혀있는 특수한 곤봉을 가지고 학생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등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진압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시위를 하지도 않았던 교수들과 주변 학원에 있던 학생들까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만행을 저지름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광주역에서 다시 집결하여 과잉 진압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전남대에 모여 시위하는 학생들)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군인) 

      


  그런데 정부는 사과는 커녕 오히려 더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공수부대는 평화롭게 시위하고 있는 시민들을 곤봉으로 무차별적으로 폭행 했고, 심지어 주변 주민들과 구경꾼들까지 구타를 자행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전쟁시 적군을 죽이기 위해 쓰는 대검으로 시민들을 찔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붙잡힌 여성들의 옷을 찢고 성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첫 희생가자 발생하는데요. 당시 시위도 하지 않았던 김경철씨가 공수부대원들로부터 전신구타를 당하고 다음날 새벽에 숨지게 됩니다. 


  당시 그의 진료 기록에 따르면 '안구파열, 목뼈 골절, 팔과 어께의 골절, 엉덩이와 허벅지 파열'의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김경철 씨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김경철씨는 과격한 시위 진압 현장을 보러 나왔다가 현장에 휩쓸려 함꼐 구타를 당한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518일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에 의해 흩어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격렬한 항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2.2 제 2시기 - 평화 시위에서 항쟁으로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은 19일부터 입니다. 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실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 하게 딥니다. 이로써 학생들 위주로 시작 된 시위가 모든 세대가 합류 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각목, 쇠파이프, 돌맹이, 화염병 등으로 무장 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것 없이 곤봉을 휘둘렀고, 심지어는 시민을 향해 M16소총을 난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군이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께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또 전날 계엄군에게 아무 연유 없이 무차별하게 구타 당했던 김경철씨도 끝내 소천하시게 됩니다


  시민들이 특히나 분노 했던 사실 중 하나는 그 어떤 언론도 지금 광주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언론들은 신군부의 통제 아래서 광주에서 발발한 폭도들의 무력 시위를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고 방송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광주 MBC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2.3 제 3시기 -  무장시위한 시민들 


  20일 이후부터는 도시빈민들과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충격과 이로써 사상자들이 속출하자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중 탈취한 소총과 무기로 무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시위 최대의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계엄군이 총기까지 사용하자 맨몸 시위에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후 6시40분경 금남로에서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를 동원 합니다. 200여대의 차량은 계엄군과 대치하여 시위하는 시민들을 지키는 방패 역활을 했습니다. 이에 계엄군은 최루탄과 가스로 탑승자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량시위대에 헌신에 힘입어 계엄군을 전남도청까지 압박 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광주역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에 밀리자,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또 한번의 집단 발포를 자행 합니다. 이로 인해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200여대의 차량 시위대 모습) 



  이런 말도 안되는 진압이 일어나는 와중에 모든 언론들은 침묵 했습니다. 이는 언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노동청과 세무서 등 공공기관으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에 대해 규탄 하였으니 모두 침묵으로 일관 하였으며, 무엇보다 팩트를 세상에 알려야 할 방송국들은 사실은 커녕 오히려 왜곡된 진실만 전할 뿐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에 대한 상황은 폭도들에 의한 무력 시위로 보도가 되며 군인들이 진압중이라며 오히려 시민들을 매도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MBC방송국을 불태워 버립니다.


 2.4 제 4시기  계엄군의 집단 발포


  5월 21일, 광주와 외부를 연갈하는 전화가 차단되기에 이릅니다. 또 전날 사망했던 2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에 약 30만명의 광주시민들은 금남로에 모여 전남도청으로 나아갑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과잉진압을 인정하고 12시까지 사과 할 것을 요구 합니다. 이런 시민들의 강한 요구에 계엄군은 철수 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떄 당시만해도 시민들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12시가 지나도 철수 하지 않았고 시민들은 버스를 이용해서 저지선을 뚫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리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 집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계엄군은 비무장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합니다. 심지어 고층건물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시민들을 저격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총에 맞은 부상자들을 옮기는 사람들에게도 총을 쏘는 등 보이는 사람이면 모두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이 집단 발포로 인해 54명이 사망, 약 500여명이 부상을 게 됩니다. 



  당시 시민들을 치료 했던 전남대병원의 21일 진료 기록에 따르면, 21~23일 3일간 전체 사상자의 68%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상자들의 주원인은 총상이 91명(40.8%)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구타가 58명(26%)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특히나 21일에만 8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때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그 순간에, 모순적으로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계엄군은 이날 집단 발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총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위대는 항생 지도부를 구성한 '시민군'을 편성했습니다. 또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목포, 영암, 장성, 나주 등으로 진출 했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시민군이 형성되자 계엄군과 시민들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띄게 됩니다. 



 2.5 제 5시기  민주 시민공동체의 항전 


  시민군의 항전으로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후퇴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주요 고속도로와 통신선 등을 모두 차단해 버립니다. 이는 시위가 타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이로인해 광주는 완전히 봉쇄 고립 되게 됩니다. 계엄군은 그 와중에도 광주 외각에서 민간인들을 학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때 민간인 학살로 15살의 방괌범 군과 놀이터에서 계엄군의 난사로 전재수 군이 사망합니다. 또 여고생 손옥례시는 엉덩이에 총에 의한 관통으로 사망하였는데요, 이때 계엄군은 그녀의 가슴을 대검으로 찢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름니다.


 



  이런 계엄군의 만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계엄군이 철수 하면서 광주는 말그대로 아노미 상태였습니다. 공권력은 사라지고 총기 수천정이 풀려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 광주의 상황은 아비규환이었을까요? 아니요, 반대로 시민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도우며 민주화 운동을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광주시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시민 자치 공동체'를 구성 했습니다. 이들은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 등 유인물을 배포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는 자유발언을 통해 난국을 벗어난 지혜를 한 곳에 모았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무정부상태의 광주였지만 혼란은 커녕 오히려 범죄 발생율은 평소 보다 낮았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양심을 지키며 민주화 운동에 가담 했습니다. 당시 외부와 고립되었던 광주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료품을 나누어 시민군들을 먹였습니다. 또다친 사람들을 위해 의약품을 내어주었고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헌혈을 통해 함께 했다고 합니다. 


  이 항쟁은 27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당시 광주 시민군은 전남도청에 자리 잡아 최후 항전을 준비 했습니다. 시민군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내보내어 역사의 증인이 되어 줄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27일 새벽 4시경 자동 소총과 수류탄, 헬기와 전차로 완전 무장한 2만여명의 정규 부대가 전남도청으로 진입합니다. 이들은 30여분만에 시민군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진압작전을 마무리 합니다. 


 3.518민주화운동의 의의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전두환은 약 3개월뒤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디. 피로 억룩진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12쿠데타를 시작으로 10개월에 걸친 쿠데타가 마무리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광주를 잔인한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전개 된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군사정권을 끌어내린 87년 6월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은 결국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처절했던 항쟁은 폭력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광주에서 함께 모여 서로 나누며 함께 했던 시민 공동체 정신은 현대인들에게 공동체 정신이 무엇인가 교훈해 집니다. 


  지금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들의 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 진것임을 기억하며, 지금 이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고 발전해 나가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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