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보가 전해졌습니다.

배우 이선균님의 사망 소식입니다.

자가용 차에서 의식불명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이송되셨고 결국 사망하셨다고 합니다.

우리에게 배우로 큰 즐거움을 주었단 별이 졌습니다.
슬플을 감추기 쉽지 않네요.

이선균씨는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선균씨의 유서의 정확한 내용이 전해지지는 않았지만 아내 전혜진씨에게 남긴 말이 있다고 합니다.

이 방법 밖에는 없는 것 같아



이 문장에 참 많은 생각이 듭니다.

이선균씨의 비보가 전해지기 불과 며칠전 많은 일들이 있었죠.

이선균씨는 하루전날 17시간가량의 강도높은 밤샘 조사를 받았습니다.

또 가로세로연구소(가세연)에서 이선균 마담으로 알려진 김모씨와의 녹취록이 공개됬죠



이런 사건들은 여러 추측들을 낳고 가쉽거리로 소비 했습니다.

이런 행태들이 그를 벼랑 끝으로 몰아 간것은 아닐까요

이선균 마담으로 알려진 사람은 유흥업소 종업원 김남희씨인데요
이분의 마약폭로로 인해 이 모든 일련의 일들이 시작 됬죠.

이를 두고 결과론적이만,
전과 6범에 달하는 한명의 진술로 시작된 이 조사가
한 사람에게 너무 가혹했던 것이 아니냐 하는
논란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비보가 전해진 후에 이런 말들을 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냐만은요.






  삼성그룹 이재용 부회장이 재판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 받았습니다. 법원은 이재용 부회장이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에게 경영승계에 도움을 주는 대가로 뇌물을 건냈다고 판단 했습니다.

 따라서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에게 적용된 뇌물 공여를 비롯하여 5개 항목에서 모두 유죄라고 밝혔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재용 선고의 결과는 집행유예 없이 징역 5년으로 마무리 됬습니다.

   사실 검사측에서 공소 제기한 형량은 12년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부회장의 혐의 5가지 모두가 유죄 판결 났음에도 불구하고 5년의 징역이 선고 된것은 아쉬운 면이 있습니다.  재판이 시작 되기 전 법률전문가들은 5~7년의 형량을 예상했는데요. 전문가들의 분석이 그대로 맞아 떨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재용 부회장은 어떤 이유로 감형을 받은 걸까요?


  
 이재용 부회장이 5년을 선고 받은 이유는 횡령과 국외재산도피 혐의가 인정되었기 때문입니다. 법원은 이 부회장의 혐의 가운데 '가장 중한 범죄'에 해당하는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에관한법률상(이하 특경법) 횡령 및 재산국외도피 혐의를 기준으로 징역 5년을 선고 한 것입니다.

  여기서 이재용 부회장이 감형을 받은 것은 횡령 및 국외도피 재산의 인정 액수와 관련이 있습니다. 처음 특검에서 제시한 횡령액은 400억원이 넘는 액수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재판에서 죄로 인정된 액수은 약 80억원에 불과 합니다. 재판부는 이재용 부회장이 재단에 뇌물로 공여한 200억원 가랑에 대해서 "수동적 뇌물공여"라며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여기서 수동적 뇌물공여는 "마지못해 건네준것"이라는 것입니다. 대통령의 투자요구에 탐탁치 않았지만 미르재단에 투자했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나머지 약 200억 중에서도 이번 재판에서 유죄인정 받은 것은 정유라에게 말 구입 및 청탁의 대가로 지불한 80억원에 불과 합니다. 법원은 이 금액은 이재용의 경영승계에 대한 뇌물로 건낸것이라고 유죄 판결을 했습니다.

 따라서 법원은 횡령 및 뇌물공여 금액을 80억원만 인정하여 5년 징역을 선고한 것입니다. 일각에서는 실형이 내려졌다는 사실로 이재용 부회장이 엄벌에 쳐해졌다고 떠들고 있는데요.  정말 그럴까요? 저는 1심에서의 5년이 과연 최종심에가서 실형으로 끝날지 사실 의문입니다.



  어제 선고를 통해 이재용 부회장에게 내려진 징역 5년은 하한선으로 내려진 형량입니다. 이 부회장은 공소 된 죄목 중 가장 중한 항목인 '특경법' 기준으로 형량을 받았습니다. 특경법에 따르면 개인이 횡령, 배임등을 통해 이익을 얻은 금액이 100억이 넘을 경우 최소 징역 10년에 처하게 됩니다. 만약 특검측이 주장한 횡령 금액 420억원이 적용 됬다면 이 부회장은 최소 10년의 징역을 받아야 합니다. 이를 기준으로 특검측은 12년을 구형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중에서 이 부회장이 유죄판결 받은 것은 80억원에 불과 합니다. 그래서 이 부회장은 특경법의 횡령 금액이 50억원이 넘을 경우 최소 5년의 징역에 처한다는 기준에 따라 5년형이 선고 된 것입니다. 이 부회장이 5개 항목에서 모두 유죄를 빋았고 가중처벌이 가능했다는 점에서 그가 받을 수 있는 형량은 5~35년 사이었습니다. 그런데 5년형이라는 하한선의 형을 선고 받은 것이죠.

  사실 이 형량이 실형으로 집행된다면 저는 정의에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재벌총수에게 실형이 떨어지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이죠. 그런데 문제는 이런 판결이 2,3심에서 뒤집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바로 판사의 "작량감경" 때문입니다. 
작량감경은  정상참작 사유가 있을때 법관 재량으로 형량의 최대 50%까지 감량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번 이재용 선고에서 내려진 징역 5년형은 '특경법' 기준 하한 5년을 선고 했지만 작랑감경은 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추측컨데 국민들의 여론을 생각해봤을때,  만약 실형이 아닌 집행유예가 떨어진다면 아마 비난을 면치 못했을 것입니다. 따라서 실형은 내리되 삼성측에 가장 유리한 5년을 선고 했다고 보여 집니다.
 
  그런데 문제는 재판은 3심제도라는 것이죠. 아직 이재용 측에서는 2번의 재판 기회가 남아 있습니다. 집행유예는 3년이하의 징역에 대해서만 적용이 가능합니다. 즉,  최소 3년 이하의 징역을 받아야만 집행유예가 가능하다는 것이죠.따라서 삼성측은 3년이하의 징역을 목표로 2심을 준비할 것입니다.

  만약에, 2심에서 작량감경이 적용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작량감경으로 형량이 50% 감경되어 2년6개월의 징역이 선고 된다면 아마 100% 집행유예가 떨어질 것입니다. 자, 과연 5년의 징역은 엄벌일까요? 독자 여러분 이 선고가 합당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이재용 선고를 두고 박주민 의원은 2심 재판부가 집행유예를 선고 할 가능성이 높다고 말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러 전문가들이 2심 집행유예 가능성을 점치고 있습니다. 이번 이재용 선고는 전문가들이 쉽게 예상 할 수 있는 시나리오대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는 쉽게 판단되는 뻔한 재판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2심재판을 전문가들이 집행유예를 예상한다면 이 또한 뻔한 그림이 나오지 않겠습니까??


  징역5년 선고는 얼핏보면 엄벌인듯 하지만 사실 3.5법칙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35법칙은 재벌 총수들이 1심에서는 징역5년을 받지만 2심에서는 징역3년 집행유예 5년을 받는 것을 말합니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되고 새 정부가 출범하였으나, 대한민국에 깊게 뿌리 박고 있는 정경유착과 법경유착은 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듯 합니다.물론 재판의 결과가 제 예상과 반대로 가면 좋겠습니다.

이 나라에 정의가 이루어지는 그날은 언제일까요?


  

  8월 2일에 개봉한 영화 '택시운전사'를 아시나요? 14일만에 900만을 돌파하며 1000만 초읽기에 들어간 흥행 영화 입니다. 택시운전사는 송강호 주연으로 광주에서 일어난 5 18민주화운동이라는 실화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도 어제 이 영화를 보고 왔는데요. 5 18민주화운동은 우리 역사에 있어서 자랑스러운 민주화 운동의 표본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동시에 가슴아픈 역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이 아픈 역사가 마음을 울려 가슴이 먹먹했습니다. 

  그런데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원인이나 배경,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모르시는 것 같습니다. 영화를 보는 동안 기성세대들조차 그 배경을 몰라서 "이게 왜 이렇게 된거야?"라고 속닥이는 소리들이 많이 들렸습니다.

 이를 보니 역사에 대한 인식이 너무 부족하구나 하는 생각에 518 민주화 운동에 대한 원인과 배경,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포스팅 하고자 합니다.


1. 518민주화 운동의 배경

 

 1.1 1026사태와 1212군사쿠데타 

  518민주화운동의 배경이 되는 1980년대는 격변의 시기였습니다. 사람들은 독재 정권을 청산하고 민주주의를 꿈꾸었고, 군사정권은 다시 독재정권을 수립하기 위해 계엄령을 선포하는 폭풍 속에 있었습니다. 그 격변의 시초를 알린 것이 1979년 10월 26일 일어난 김재규의 박정희 암살 사건 입니다. 


'

(박정희를 살해하는 최규하의 모습)


  당시 중앙정보부장, 지금으로 따지면 국정원장격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전 대통령을 살해합니다. 그리고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대통령 대행을 하게 되고 그 해 12월 6일 대통령 간선제를 통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는 1961년 박정희가 5.16군사정변으로 정권을 잡은지 18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으며, 국민들은 18년간 이어진 독재 정권은 종말을 기대 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에도 민주주의에 여명이 밝아 왔다라고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1212쿠데타의 주인공 전두환)


   그런데, 국민들의 기대도 얼마가지 않아 최규하가 새 대통령으로 당선 된지 6일만에 전두환에 의해 1212 군사쿠데타가 일어나게 됩니다. 대통령 취임식을 9일 앞둔 상황에서, 전두환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가 박정희를 암살한 김재규와 내통 했다는 명분으로 정승화를 체포하면서 군사 쿠데타를 일으킵니다. 


  이로써 전두환의 신군부가 실권을 장악하게 되었고 최규하는 예정된 대로 21일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지만 사실상 정상적인 국정운영은 불가능한 상태였습니다. 결국 대통령 취임 8개월만에 최규하는 대통령직을 사임하고 전두환이 대통령에 취임하게 됩니다. 이로써 박정희의 대통령의 죽음으로 인해 끝날것 같았던 군사정권의 독재 정치는 전두환이라는 새로운 독재자에 의해 그 기간을 연장하게 됩니다.



  1.2 민주화에 대한 열망 '서울의 봄'


  박정희의 죽음으로 인해 새 정부가 들어서고 이제는 독재의 압제 속에서 벗어 날 수 있을것이라는 큰 희망 속에 있었던 당시의 국민들은 1212사태로 인해 새로운 군사정권이 들어 섰지만 민주화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서울의 봄'이라는 것은 1979년 1026사태 이후부터 1980년 5월17일까지 정치적 과도기를 일컫는 말로써 체코의 '프라하의 봄'에서 빗댄 말로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기에 민주화의 봄이라고도 부릅니다. 당시 국민들은 민주화에대한 열망으로 군사정권에 저항하고 민주화를 부르짖었습니다.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은 주로 대학생들로부터 시작 되었습니다. 1980년 5월 10일, 23개 대학 대표로 구성된 전국 총학생 회장단은 ‘비상계엄의 즉각 해제, 전두환·신현확 등 유신잔당의 퇴진’ 을 외치며 거리로 나섰습니다. 5월 13일을 기점으로 거리시위는 큰 규모로 발전 하였고 5월 15일 서울역에서의 시위는 절정을 이루었습니다. 이때 시위는 서울 뿐만 아니라 광주에서도 활발하게 일어나고 있었죠. 그런데 이런 시민들의 움직임에 신군부는 적반하장으로 17일 전국으로 비상계엄령을 확대하는 만행을 보여주었습니다. 이러한 배경이 5월18일 광주에서 민주화 운동을 촉발 시킨 것입니다.  


(출처 518 기념재단)



2. 518민주화 운동의 전개


 5월 18일, 광주에서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5가지 국면으로 구분 할 수 있습니다. 


 2.1 제 1시기 - 전남대에서 촉발된 시위 


   제1시기는 학생들의 시위로 인한 항쟁의 발단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518민주화운동의 신호탄은 전남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전국의 대학교는 계엄령에 인해 휴교조치가 내려졌습니다. 전국에 공수부대들이 주둔하면서 학교 입구를 막고 등교하는 사람들을 저지했습니다. 이제 맞서 학생들은 "계엄군은 물러가라!"는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였습니다. 


  그런데, 이에 공수부대원들은 학생들을 무자비 하게 구타합니다. 그들은 쇳조각이 박혀있는 특수한 곤봉을 가지고 학생들의 머리를 내려치는 등 비상식적인 방법으로 학생들을 진압하게 됩니다. 심지어는 시위를 하지도 않았던 교수들과 주변 학원에 있던 학생들까지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만행을 저지름니다. 이런 말도 안되는 진압에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은 광주역에서 다시 집결하여 과잉 진압에 대한 사과를 촉구하는 시위를 벌입니다. 


               (전남대에 모여 시위하는 학생들)     (민간인을 무자비하게 폭행하는 군인) 

      


  그런데 정부는 사과는 커녕 오히려 더 많은 공수부대원들을 보내기에 이릅니다. 공수부대는 평화롭게 시위하고 있는 시민들을 곤봉으로 무차별적으로 폭행 했고, 심지어 주변 주민들과 구경꾼들까지 구타를 자행했습니다. 당시 공수부대원들은 전쟁시 적군을 죽이기 위해 쓰는 대검으로 시민들을 찔렀다고 합니다. 심지어 붙잡힌 여성들의 옷을 찢고 성폭행을 하기도 했습니다. 이런 아비규환의 상황 속에서 첫 희생가자 발생하는데요. 당시 시위도 하지 않았던 김경철씨가 공수부대원들로부터 전신구타를 당하고 다음날 새벽에 숨지게 됩니다. 


  당시 그의 진료 기록에 따르면 '안구파열, 목뼈 골절, 팔과 어께의 골절, 엉덩이와 허벅지 파열'의 부상을 입었다고 합니다. 게다가 더욱 충격적인 사실은 당시 김경철 씨는 소리를 들을 수 없는 청각 장애인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마 김경철씨는 과격한 시위 진압 현장을 보러 나왔다가 현장에 휩쓸려 함꼐 구타를 당한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518일 시작된 민주화운동은 공수부대의 과격한 진압에 의해 흩어지게 되었지만 오히려 더 격렬한 항쟁으로 번지게 됩니다. 



 2.2 제 2시기 - 평화 시위에서 항쟁으로  


  민주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 된 것은 19일부터 입니다. 학생들의 시위를 무력으로 진압한 사실에 분노한 시민들이 시위에 합세 하게 딥니다. 이로써 학생들 위주로 시작 된 시위가 모든 세대가 합류 하면서 봉기의 형태로 발전하게 됩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의 폭력에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서 각목, 쇠파이프, 돌맹이, 화염병 등으로 무장 했습니다. 그럼에도 계엄군은 남녀노소 할것 없이 곤봉을 휘둘렀고, 심지어는 시민을 향해 M16소총을 난사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김영찬군이 계림파출소 인근에서 께엄군이 쏜 총에 맞아 중상을 입게 됩니다. 또 전날 계엄군에게 아무 연유 없이 무차별하게 구타 당했던 김경철씨도 끝내 소천하시게 됩니다


  시민들이 특히나 분노 했던 사실 중 하나는 그 어떤 언론도 지금 광주의 상황을 보도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언론들은 신군부의 통제 아래서 광주에서 발발한 폭도들의 무력 시위를 군대가 진압하고 있다고 방송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방송국에 찾아가 항의하기도 했으며 그 과정에서 광주 MBC건물에 화재가 발생하기도 합니다. 



 2.3 제 3시기 -  무장시위한 시민들 


  20일 이후부터는 도시빈민들과 노동자들도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했습니다.  특히나 계엄군의 발포로 인한 충격과 이로써 사상자들이 속출하자 시민들은 계엄군과 대치중 탈취한 소총과 무기로 무장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 때 시위 최대의 전환점을 가져온 사건이 발생하는데요.


   계엄군이 총기까지 사용하자 맨몸 시위에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오후 6시40분경 금남로에서 버스, 화물차, 택시 등으로 구성된 200여 대의 차량 시위대를 동원 합니다. 200여대의 차량은 계엄군과 대치하여 시위하는 시민들을 지키는 방패 역활을 했습니다. 이에 계엄군은 최루탄과 가스로 탑승자들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차량시위대에 헌신에 힘입어 계엄군을 전남도청까지 압박 합니다.  이런 상황속에서 광주역에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은 시민들의 격렬한 시위에 밀리자, 그들은 시민들을 향해 또 한번의 집단 발포를 자행 합니다. 이로 인해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게 됩니다. 



(200여대의 차량 시위대 모습) 



  이런 말도 안되는 진압이 일어나는 와중에 모든 언론들은 침묵 했습니다. 이는 언론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시민들은 노동청과 세무서 등 공공기관으로 몰려가 정부의 잔혹한 진압에 대해 규탄 하였으니 모두 침묵으로 일관 하였으며, 무엇보다 팩트를 세상에 알려야 할 방송국들은 사실은 커녕 오히려 왜곡된 진실만 전할 뿐이었습니다. 당시 광주에 대한 상황은 폭도들에 의한 무력 시위로 보도가 되며 군인들이 진압중이라며 오히려 시민들을 매도 했습니다. 이에 분노한 시민들은 MBC방송국을 불태워 버립니다.


 2.4 제 4시기  계엄군의 집단 발포


  5월 21일, 광주와 외부를 연갈하는 전화가 차단되기에 이릅니다. 또 전날 사망했던 2구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에 약 30만명의 광주시민들은 금남로에 모여 전남도청으로 나아갑니다. 시민들은 계엄군에게 과잉진압을 인정하고 12시까지 사과 할 것을 요구 합니다. 이런 시민들의 강한 요구에 계엄군은 철수 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이떄 당시만해도 시민들의 승리처럼 보였습니다. 그런데 계엄군은 12시가 지나도 철수 하지 않았고 시민들은 버스를 이용해서 저지선을 뚫고 나아갔습니다. 


  그러다 오후 1시 도청 스피커에서 애국가가 울리자 말도 안되는 일이 벌어 집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동시에 계엄군은 비무장상태의 시민들을 향해 무차별적으로 총기를 난사합니다. 심지어 고층건물에는 저격수를 배치하여 시민들을 저격하기까지 했습니다. 또 총에 맞은 부상자들을 옮기는 사람들에게도 총을 쏘는 등 보이는 사람이면 모두에게 총격을 가합니다. 이 집단 발포로 인해 54명이 사망, 약 500여명이 부상을 게 됩니다. 



  당시 시민들을 치료 했던 전남대병원의 21일 진료 기록에 따르면, 21~23일 3일간 전체 사상자의 68%가 나왔다고 합니다. 사상자들의 주원인은 총상이 91명(40.8%)으로 압도적으로 많았고 구타가 58명(26%)로 그 뒤를 이었습니다.  특히나 21일에만 8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는 이때의 참상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그 순간에, 모순적으로 시민들을 향해 총을 난사하는 계엄군의 만행에 시민들은 더욱 분노했습니다. 계엄군은 이날 집단 발포를 계기로 본격적으로 총기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시위대는 항생 지도부를 구성한 '시민군'을 편성했습니다. 또 시위대는 고립을 극복하기 위해 목포, 영암, 장성, 나주 등으로 진출 했고 아시아자동차 공장에서 장갑차 등의 차량을 확보하고 광주,전남 일대의 경찰서와 예비군  탄약고에서 총기와 탄약을 확보했습니다. 이렇게 시민군이 형성되자 계엄군과 시민들과의 공방은 시가전 양상을 띄게 됩니다. 



 2.5 제 5시기  민주 시민공동체의 항전 


  시민군의 항전으로 공수부대는 광주에서 후퇴하지만 광주로 통하는 주요 고속도로와 통신선 등을 모두 차단해 버립니다. 이는 시위가 타지역으로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한 조치로 이로인해 광주는 완전히 봉쇄 고립 되게 됩니다. 계엄군은 그 와중에도 광주 외각에서 민간인들을 학살 하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때 민간인 학살로 15살의 방괌범 군과 놀이터에서 계엄군의 난사로 전재수 군이 사망합니다. 또 여고생 손옥례시는 엉덩이에 총에 의한 관통으로 사망하였는데요, 이때 계엄군은 그녀의 가슴을 대검으로 찢어 버리는 만행을 저지름니다.


 



  이런 계엄군의 만도 불구하고 시민들은 굴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계엄군이 철수 하면서 광주는 말그대로 아노미 상태였습니다. 공권력은 사라지고 총기 수천정이 풀려 있는 상황이었죠. 그런 광주의 상황은 아비규환이었을까요? 아니요, 반대로 시민들은 함께 모여 서로를 도우며 민주화 운동을 계속 이어 나갔습니다. 광주시민들은 모두 하나가 되어 '시민 자치 공동체'를 구성 했습니다. 이들은 매일 '시민궐기대회'를 열어 사건의 진상과 정황을 알리는 성명서 등 유인물을 배포했고,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하는 자유발언을 통해 난국을 벗어난 지혜를 한 곳에 모았습니다. 





  한가지 놀라운 사실은 무정부상태의 광주였지만 혼란은 커녕 오히려 범죄 발생율은 평소 보다 낮았다는 것입니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양심을 지키며 민주화 운동에 가담 했습니다. 당시 외부와 고립되었던 광주는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식료품을 나누어 시민군들을 먹였습니다. 또다친 사람들을 위해 의약품을 내어주었고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헌혈을 통해 함께 했다고 합니다. 


  이 항쟁은 27일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당시 광주 시민군은 전남도청에 자리 잡아 최후 항전을 준비 했습니다. 시민군은 아이들과 여성들을 내보내어 역사의 증인이 되어 줄것을 부탁합니다. 그리고 27일 새벽 4시경 자동 소총과 수류탄, 헬기와 전차로 완전 무장한 2만여명의 정규 부대가 전남도청으로 진입합니다. 이들은 30여분만에 시민군들을 무참하게 짓밟고 진압작전을 마무리 합니다. 


 3.518민주화운동의 의의

 

 518민주화운동을 진압한 전두환은 약 3개월뒤 제 11대 대통령으로 취임하게 됩니디. 피로 억룩진 역사가 아닐 수 없습니다. 12/12쿠데타를 시작으로 10개월에 걸친 쿠데타가 마무리는 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두환은 광주를 잔인한 무력으로 진압함으로써 자신이 승리했다고 생각했겠지만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전개 된 민주화 운동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특히나 군사정권을 끌어내린 87년 6월민주항쟁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 국민은 결국 민주화를 이루어 내었습니다. 광주에서의 처절했던 항쟁은 폭력 앞에서도 결코 굴하지 않는 자유민주주의 정신을 보여 주었으며, 광주에서 함께 모여 서로 나누며 함께 했던 시민 공동체 정신은 현대인들에게 공동체 정신이 무엇인가 교훈해 집니다. 


  지금의 민주주의와 평화는 그냥 만들어 진 것이 아니라 앞선 세대들의 민주주의 정신에 의해 만들어 진것임을 기억하며, 지금 이 시대에도 이를 계승하고 발전해 나가야 할 과제를 우리는 가지고 있습니다. 








나영석PD의 '알쓸신잡'이 화제이지요?

오늘은 알쓸신잡에서 소개 되었던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에 대해

포스팅 해보고자 합니다.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젠트리피케이션은

 "낙후됐던 구도심이 번성해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몰리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원주민이 내몰리는 현상"


이게 사전적인 정의 입니다.

쉽게 말하면 "굴러 온 돌이 박힌 돌 빼낸다"라고 말 할 수 있겠습니다.

좀 더 세부적으로 설명해 보겠습니다.


그 과정을 설명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원래 낙후되었던 도시가 정부의 개발 정책으로 인해 발전하여 

영세업자들이 급증하게 되고 이것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외부에서 중산층들이 몰려 들어 오는 것입니다.

외부에서 유입된 인구가 많아 지면서 중산층들은 

너도 나도 영세업을 하고자 하겠죠?

그렇다 보니 '자리경쟁'이 심해서 임대료가 오르게 됩니다.


이로 인해 원래 그 도심에서 살던 주민들이 올라가는 임대료를 감당하지 못해

오히려 굴러들어온 돌에게 쫓겨나는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죠.


'gentrification'의 동사형인 'gentrify'은 "슬럼가가 고급주택화 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gentrify는 상류계급, 혹은 신사를 의미하는 gentry 파생 된 것인데요

낙후 된 슬럼가에 중산층들이 몰려 들면서 집 값, 임대료, 재산세, 기타세 등 
여러 분야에서 비용이 상승하면서 낙후 지역에 살고 있던
원주민들이 쫓겨 나게 된 것입니다.

이는 우리나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니라
세계 각국의 선진국에서 발생하는 현상이기도 합니다.

젠틀리피케이션은 긍정적인 측면과 부정적인 측면을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낙후 되었던 구도심 지역에 많은 투자금이 유입되게 되고

중산층의 유입으로 인하여 시장이 활성화 되고 도심화가 일어 납니다.

쉽게 말하면 낙후 도시가 도심으로 발전한다 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낙후지역은 낮은 집 값, 임대료 등으로 인해

일반적으로 저소득층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낙후지역에 중산층의 자본이 유입되게 되면

기존의 저소득층들은 자신이 살아 왔던 터전을 빼앗기는 결과를 맞게 됩니다.


이것은 젠트리피케이션의 발생 과정에 대한 그레프입니다.

보시면 빨간선은 '지역활성화정도'이고 회색선은 '임대료' 입니다.

앞서 말씀 드렸던것 처럼 중산층들이 낙후된 도시에 유입 될 경우

도시가 발전하게 됩니다.

그 결과 지역 활성화가 가파르게 진행 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와 비례하여 임대료도 상승하게 됩니다.

공급은 증가하지 않는 상태에서 수요가 많아졌기 때문이죠.

중간즘에 보시면 지역 활성화는 절정에 이르렀지만

임대료는 그에 반해 크게 오르지 않는 구간이 있습니다.

저 구간 지역도 활성화 되면서 임대료도 무리하게 오르지 않는

상생의 상태일 것입니다.


하지만 젠트리피케이션이 한번 진행되게 되면

결국 시간이 지나 지역활성화 정도보다 임대료가 비정상적을 치솟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아무리 지역이 활성화 되서 영세업자들의 벌이가 늘어났다고 해도

비정상적인 임대료 경쟁은 영세업자들을 벼랑으로 몰고 가게 됩니다.


실제 우리나라에서 젠트리피케이션이 발생한 이슈지역들 입니다.

아주 대표적으로 가로수길과 경리단길이 있구요, 지금의 홍대는 서울의 핫플레이스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연남동, 해방촌, 차이나타운 등 

모두가 원래는 낙후된 지역이었지만

중산층들이 대거 유입되면서 지금은 완전히 도시화된 상태 입니다.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낙후된 도시가 활성화 되고 도심화 된다는 점에서

경제적으로 큰 의미가 있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두운 이면이 있는게 사실 입니다.

따라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나타나는 지역의 핵심은 '상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대안으로 '상가임대차보호법'을 개정하여 

임대료 인상 한도를 낮추고 갱신청구권을 5년보다 더 길게 연장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또 건물주와 상인들이 서로 연대하고 상생하여

계약 기간동안 적당한 임대료를 유지하고 있는 모범 건물주들에게

자치구에서 합당안 보상을 줌으로 

건물주와 상인 사이에 상생을 도모하는 방법도 있겠습니다.


현대 사회에 들어서서, 발전도 중요하지만 

결국 인류의 발전은 인류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모두가 행복 해 질 수 있는 대한민국이 되는 그 날을 꿈꾸어 봅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탄핵안이 결의 된 후 업무 정지가 되서도 대통령 권한으로 돈을 지출 했다고 합니다.
업무 정지 이후 청와대를 나가기까지 70여일 동안
무려 하루에 5천만원에 달하는 돈을 지출 했다고 합니다.
그 명목은 대통령 '특수 활동비' 입니다.

현정 헌법 상 탄핵안이 국회에서 가결 되면
대통령은 모든 업무 능력이 정지 됩니다.
따라서 탄핵안이 인용되기 전까지 황교안 국무총리가
그 대행을 하기도 했구요.
이 상황에서도 국민의 혈세를 낭비 하고 있었다니
정말 전 대통령이였다는게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이 쯤되니 이분이 생각 납니다.

예산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정말 국가에 도둑놈이 많네요.


요즘 가장 핫한 키워드는 '노룩패스' 아닐까요?

바른정당 국회의원인 김무성이 공항에서 들어오면서

자신의 캐리어를 수행원에게 '노룩패스' 하는 영상이 화제가 되었습니다.

이는 그의 성품이 얼마나 별로인가 보여주는 영상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 일명 '노룩패스 시리즈'가 나오고 있는데요 ㅋㅋㅋ

제가 한번 모아 봤습니다.


1. 역사상 가장 위대한 노룩패스 TOP5 

 외!!! 쳐!! THE KING GOD 무성!


2.방송인, 스초츠인,일반인 등 패러디 모음


3.캐리어 컬링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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